시대와 마음에서 본 선거제 개혁 | 지성용
지성용
신부, 가톨릭관동대 교수
응답과 자리매김 ― 오늘의 발제는 설계도다
먼저 곽노현 이사장님의 발제에 깊이 공감하며 경의를 표합니다. 우리 선거제 논쟁은 늘 결론부터 부딪혀 왔습니다. 오늘 발제는 그 순서를 바로잡았습니다. 대표성과 비례성, 등가성과 다양성, 지역대표성과 유권자 효능감이라는 여섯 기준을 먼저 세우고, 그 기준으로 현행 제도를 채점했습니다. 무엇보다 ‘무엇을 고칠 것인가’와 ‘누가 정할 것인가’를 한 묶음으로 내놓았 습니다. “게임의 규칙은 선수가 정하지 않는다.” 이 한 문장에 오늘 이 자리의 존재 이유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발제는 잘 그려진 설계도입니다. 그러나 좋은 설계도도 땅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저는 그 설계도가 서야 할 땅, 곧 우리가 사는 시대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말씀드리고, 설계도를 더 단단하게 하기 위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시대 ― 벽의 시대와 바이마르의 질문
요즘 세계를 보며 저는 자꾸 1930년대를 생각합니다. 경제적 불안과 분노,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 강한 지도자에 대한 갈망. “우리 국민이 먼저다.” “국경을 지켜야 한다.” 그 말들이 사람 사이에 벽을 세웠고, 마지막에는 총과 탱크가 그 벽을 대신했습니다. 지금 세계가 다시 벽을 쌓습니다. 트럼프의 관세의 벽, EU국가들의 이민의 벽, 그리고 지역선거 1위에 오른 독일의 AfD. 프랑스의 극우 국민연합의 약진, 질문은 하나로 모입니다. “누가 우리의 적인가.” 대표 되지 못한 분노는 사라지지 않고 적을 찾아 떠돕니다. 그래서 저는 대표성을 넓히자는 발제의 방향에 동의합니다. 극단 세력을 광장에 두기보다 의회 안으로 불러 순치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에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바로 1930년대가 우리에게 질문을 남깁니다. 발제는 봉쇄조항을 1%로 낮추자고 합니 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봉쇄조항이 없는 비례대표제였습니다. 1932년 이후 나치와 공산당이 함께 과반을 넘기면서 의회는 반민주 세력의 손에 마비되었습니다. 히틀러를 총리로 만든 것이 유권자가 아니라 보수 엘리트의 밀실 거래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후 독일이 비례제를 지키면서 5% 봉쇄조항과 건설적 불신임을 함께 둔 것도 사실입니다. 독일 극우가 의회 안에서 고립된 것은 포용 덕분만이 아니라, 그 포용을 견디게 한 안전장치 덕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1%는 비례적 정의로서 옳습니다. 그렇다면 의회가 극단 세력에 의해 마비되지 않게 할 우리의 안전장치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답할 때 1%는 이상(理想)이 아니라 설득이 됩니다.
마음 ― 세 번째 장벽: 두려움의 투표와 그림자
발제는 낮추어야 할 세 장벽 가운데 하나로 ‘사표 심리’라는 마음의 장벽을 꼽았습니다. 평생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아 온 저는 이 대목에 가장 오래 머물렀습니다.
사표 심리의 정체는 두려움입니다. 유권자는 가장 좋아하는 후보가 아니라, 가장 싫어하는 쪽을 막기 위해 투표합니다. 사랑이 아니라 두려움이 표를 결정합니다. 진짜 바람을 누르고 ‘될 사람’을 고르는 일이 선거마다 반복되면 실망이 쌓이고, 프로이트의 말대로 억압된 것은 돌아 옵니다. 제도 안에서 말해지지 못한 분노가 음모론과 혐오의 광장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투표에는 짝이 있습니다. 투사입니다. 융은 받아들이지 못한 자기 안의 어둠을 그림 자(Shadow)라 불렀고, 그것을 남에게 던지는 일을 투사(Projection)라 했습니다. 승자독식의 선거는 상대를 악으로 만들수록 이기는 게임입니다. 거대 양당은 서로의 그림자를 떠안으며 공생하고, 그 투사는 시민사회 안으로 번져 같은 광장에 섰던 시민들마저 서로를 배신자라 부르게 합니다. 다양한 목소리로 나뉘는 분화는 건강함인데, 이 제도는 분화를 분열로 바꿉니 다. 여기서 저는 발제가 제안한 순위투표제에서 한 가닥 희망을 바라봅니다. 발제는 이를 ‘2 순위 구애효과’라 불렀습니다. 상대 진영 지지자의 2순위 표를 얻으려면 상대를 악마로 만들수 없습니다. 상대 안에서 나와 닮은 것을 찾아야 합니다.
저는 순위투표제를 그림자를 거두어들이는 제도, 투사를 철회하게 만드는 제도로 읽습니다.
융에게 그림자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개성화(Individuation)의 시작입니다. 순위투 표제는 한 사회가 그 일을 집단적으로 연습하게 하는 장치일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신학자 마짠티(Giorgio Mazzanti)의 말로 하면 ‘공동 반대의 일치(communio oppositorum)’, 대립 하는 것들이 서로를 지우지 않고 함께 머무는 일치입니다. 연합이 선의의 문제에서 생존의 문제로 바뀐다는 발제의 통찰에 한 줄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그 생존의 연습이 결국 우리 마음의 회복이 될 것입니다.
증거 ― 4월과 9월
발제는 이해충돌이 덜한 지방선거부터 손대자고 합니다. 전략에는 동의합니다. 다만 올해의 기록 하나를 함께 놓겠습니다. 지난 4월 18일 새벽, 6·3 지방선거의 규칙이 선관위 시한 당일 자정을 넘겨서야 정해졌습니다. 광역 비례는 10%에서 14%로 조금 늘었지만, 소수정당들이 요구한 비례 30%와 2인 선거구 폐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해충돌이 덜하다는 지방 선거에서조차 거대 양당은 2인 선거구를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지방선거 개편 역시 시민의회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지난 9월, 위성정당의 청구서가 날아왔습니다. 두 번의 위성정당을 거쳐 국회에 들어간 한 젊은 정치인이 장관 후보자가 되었다가 2주 만에 물러났습니다. 한 사람을 탓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원칙을 지킨 정당은 원외로 밀려났고, 위성정당을 거친 정당은 정당성을 추궁당 했으며, 스스로 결집한 정당은 득표에 크게 못 미치는 의석을 받았습니다. 발제의 경고대로, 지역구 비중을 바꾸지 않는 한 세 번째 위성정당은 형태를 바꾸어 반드시 옵니다.
기조발제에 드리는 세 가지 질문
이제 설계도를 더 단단하게 하기 위해 세 가지를 여쭙겠습니다.
첫째, 국민투표입니다. 발제는 시민의회가 작성한 안을 국민투표로 확정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현행 헌법에서 국민투표는 대통령이 부의하는 국가 중요정책과 헌법 개정에만 열려 있습 니다. 법률안을 국민투표로 확정하는 길은 그 자체로 개헌이 필요합니다. 개헌 이전에 우리가 걸을 경로는 무엇입니까. 또 발제가 모범으로 든 브리티시컬럼비아에는 뒷이야기가 있습니 다. 시민의회가 고른 단기이양식은 2005년 주민투표에서 57.7%의 찬성을 얻고도 60% 요건에 걸려 무산되었고, 2009년 재투표에서는 부결되었습니다. 시민의회의 정당성이 투표의 문턱을 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실패에서 무엇을 배워 설계해야 합니까.
둘째, 대통령제입니다. 발제는 의회를 다당제로 재편하는 설계를 보여 주었지만, 우리는 대통 령제 국가입니다. 대통령제와 다당제의 결합은 정치학에서 ‘어려운 조합’으로 불려 왔습니다.
연동률 100%의 다당제 국회와 대통령이 맞설 때 교착을 풀 장치는 무엇이며, 선거제 개혁은 권력구조 개헌과 어떻게 함께 가야 합니까.
셋째, 지역의 불안입니다. 저는 강원도에 삽니다. 발제는 도농복합안이 양당제를 굳힌다고 비판하고, 지역 대표는 군수와 지방의원, 장차 상원에 맡기자고 합니다. 논리로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소멸을 걱정하는 지역 주민에게 ‘우리 지역구 의원이 사라진다’는 두려움은 실재합니 다. 상원은 아직 없고, 두려움은 지금 있습니다. 이 두려움을 존중하며 설득할 언어, 그리고 그사이를 메울 과도기의 장치는 무엇입니까.
맺는 말 ― 두려움을 넘어서는 다리
내년 여름, 세계의 젊은이들이 서울로 옵니다. 세계가 벽을 쌓는 바로 그때, 국경을 넘어 분단의 땅으로 모입니다. 대회의 주제는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입니다.
그리스도가 이긴 세상은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세상이 아니라, 두려움과 증오와 배제의 논리입니다. 오늘 발제가 그린 설계도도 결국 두려움의 투표를 넘어서는 다리입니다. 발제는두 번의 탄핵이 증명한 시민의 역량을 화재 진압에만 쓰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했습니다. 그역량을 다리 놓는 데 씁시다. 사표로 버려진 수많은 목소리를 기억하는 수난의 기억(memoria passionis)으로, 그 다리를 함께 놓기를 청하며 마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