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을 사표(死票)로 만드는 ‘국민주권’은 가짜다 | 이현종
순위선택, 단기이양투표제 도입해 민의(民意) 살려야
이현종
시민의회전남포럼 상임대표
대한민국의 시민은 민주주의를 훼손한 대통령을 세 번이나 직접 끌어내렸다. 이는 시민의 힘으로 민주화를 이룬 자랑스러운 역사다. 그리고 민주당에 정권을 맡겼고, 21대 국회에 이어 22대 국회에서는 개헌을 제외한 대부분의 입법을 주도할 수 있는 180석 안팎의 압도적 의석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그 민주화가 민주주의로 발전하고 정착되었는가에 대한 대답에는 ‘그렇다’라고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민들의 서글픈 자조대로,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기는” 기만극이 되풀이되고 있다.
빛의 혁명으로 이룬 현 집권정부는 ‘국민주권정부’임을 표방하고 있다. 그 말이 허언이 아니라면, 국정의 의사결정권은 마땅히 국민의 손에 쥐어져야 한다.
하지만 지금 국회에서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어떠한가?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을 조정하는 척, 사법부를 개혁하는 척, 총리와 대법관과 공공기관장 임명권을 조정하는 척 설왕설래하지만, 주권자인 국민에게 실질적인 의사결정권을 돌려주려는 진정성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저 정치인들끼리 권력을 나누어 갖는 데 몰두하는 모습만 보일 뿐이다.
시민들이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는 ‘시민참여개헌절차법’ 제정과 ‘시민의회’ 설치는 천연덕스럽게 외면하고 있다. 사법개혁을 한다면서 시민이 참여하는 ‘배심원제’나 ‘참심제’ 등은 말도 꺼내지 않는다. 겨우 ‘시민참여기본법’을 발의하였지만 상임위 서류 더미 속에 방치되어 있다.
국민발안권이나 국민소환권 같은, 국민이 직접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들은 논의 테이블에 오르지도 않는다. 시민이 촛불과 응원봉으로 만들어준 거대 여당은 이번에도 검찰개혁 하나 가지고 옥신각신하며 무능함을 재현하고 있다. 시민의 피와 땀으로 민주화의 문은 열었지만, 민주주의의 실질적 발전은 여전히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낳은 원인은 여러 가지겠지만, 그중에서도 잘못된 선거제도로 구성된 대의기구의 구조적 한계를 빼놓을 수 없다.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한다. 그만큼 선거가 민주주의를 지탱시키는 중요한 제도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 말은 선거제도가 민의를 정확히 반영할 수 있을 때 맞는 말이다.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는 선거제도 아래에서는 국회가 시민의 뜻보다 정당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할 뿐, 시민의 개혁 요구는 제도 변화로 이어지기 어렵다.
최다득표제, 소선거구제는 사표를 양산하고, 거대 양당의 적대적 대결 구조는 제3세력의 진입을 어렵게 만든다. 그 결과 정치가 정책 경쟁보다는 진영 대립에 빠져 새로운 정치 세력의 참신하고 혁신적인 정책은 등장하기 어렵다. 이러한 ‘적대적 공생 구조’에서 어떤 정치개혁을 바랄 수 있겠는가?
지방선거 역시 마찬가지다. 양당의 중앙 정치권이 조장한 적대적 국민 감정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그들은 심지어 거대 정당에 유리하도록 선거구를 조정하는 ‘게리맨더링’을 전국 각지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행하여 소수 정당이 진입할 틈새까지 막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사표(死票)가 50%를 넘나드는 선거, 차선은커녕 ‘차악’을 강요하는 적대적 지역주의에 매몰된 이런 선거가 어떻게 민주주의의 꽃일 수 있겠는가?
순위선택투표제・단기이양투표제로 민의 반영할 수 있어야
이처럼 폐해가 극심한 최다득표제를 그대로 두고서는, 민의를 배신하는 이 저급한 대립 정치를 결코 끝낼 수 없다. 선거제도의 대혁신 없이 민주주의의 발전도 불가능하다. 적어도 민주공화국임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민의를 버리지 않는 선거제 수용을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
순위선택투표제(RCV)와 단기이양투표제(STV)는 유권자의 다양한 선호를 반영하고 사표를 줄일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 단일 당선자를 뽑는 선거에는 순위선택투표제를, 여러 당선자를 뽑는 선거에는 단기이양투표제를 적용하는 방안이 적격이다. 최근 집권 여당이 당대표 선거에서 순위선택투표제(선호투표방식)을 활용한 만큼, 그 경험을 공직선거제 개혁으로 발전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다.
| 구분 | 전남 | 경남 | ||||
| 선거구 | 정당별 당선자 | 정당수 | 선거구 | 정당별 당선자 | 정당수 | |
| 12대 | 11개 | 민정11, 신민 5, 민한 5신사 1 | 4 | 10개 | 민정10, 신민 5, 민한 4한민 1 | 4 |
| 11대 | 11개 | 민정10, 민한 9, 안민 1신정 1, 한국 1 | 5 | 9개 | 민정 9, 한국 3, 사회 1농민 1, 민권 1, 무소 3 | 6 |
| 10대 | 10개 | 공화10, 신민 7, 통일 1무소 4 | 4 | 9개 | 공화 8, 신민 7, 무소 3 | 3 |
| 9대 | 10개 | 공화10, 신민 6, 통일 2무소 2 | 4 | 9개 | 공화 8, 신민 8 | 2 |
※공화=민주공화당, 농민=민주농민당, 민권=민권당, 민정=민주정의당, 민한=민주한국당, 사회=민주사회당, 신민=신민당 , 신사=신정사회당, 신정=신정당, 신한=신한민주당, 안민=안민당, 통일=민주통일당, 한국=한국국민당 (가나다 순)
이는 중대선거구가 소수정당을 비롯해 훨씬 다양한 정당의 의회 진출을 가능하게 하며, 국민의 선택권도 그만큼 넓혀질 뿐만 아니라, 적대적 지역 갈등도 완화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시민이 숙의하여 결정하고, 국회가 제도화하면 국민주권정부 아니겠는가
지금의 선거 풍토로는 민주주의를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려운 지경에 도달해있다. 그럼에도 지금의 선거제도를 방치하고 있는 국회를 시민 누구도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이제는 제도 도입의 가능성을 논의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시민의 숙의를 통해 구체적인 개혁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 국회에 그걸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국회는 선거제의 폐해를 수십 년간 지켜보면서도 근본적인 개선에 나서지 않았다.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면 ‘상대당 핑계’를 대거나 ‘서서히 변하고 있다’며 책임을 미뤄 왔다. 어떤 경우에는 뒤로 미루다 선거에 임박하여 되레 기득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선거법을 개악할 때도 있었다. 국회의원들이 자신을 선출하는 규칙을 스스로에게 불리하도록 바꾸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이다.
곽노현 교수의 말대로 ‘대리인이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스스로 정할 수 없다면, 국민의 대리인인 국회의원 역시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스스로 정해서는 안 된다.’라는 자기입법 금지의 원칙이 여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겠다. 결국은 시민들이 직접 숙의하여 선거제도의 새로운 틀을 만들어갈 수밖에 없다. 국회에서는 시민들이 직접 숙의하여 민주주의의 기틀을 다질 수 있도록 법적·제도적 판을 까는 일을 해야 한다. 시민의회와 같은 기구를 통해 시민이 결정하고 국회와 행정이 이를 제도화하고 실행하는 것, 그것이 국민주권을 구호가 아닌 현실로 만드는 길이다. 이것은 국민주권정부를 표방하는 집권여당이 완수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다.
선거제도를 바꾸지 않고서는 적대적 대결 정치는 달라지기 어렵다. 순위선택투표제와 단기이양투표제가 중대선거구제와 결합하면 상대 진영 유권자의 선호까지 고려하도록 유도해 적대적 대립을 완화할 가능성이 있다.
시민은 집권여당에 세 번째 기회를 주었다. 이제는 변명을 되풀이할 때가 아니라 실질적인 변화를 보여줄 때다. 시민의 다양한 뜻이 의회에 제대로 반영되고, 시민의 한표 한표가 존중받는 선거제도를 만드는 것이다.